일상기록
스플릿 키보드의 세계로
거북목을 벗어나기 위한 여정. 허나 생각보다 깊고 어둡고 끝이 없었다.
올바른 자세란 무엇인가
출처: https://corporateenvironments.com/blog/four-benefit-of-ergonomic-chairs
컴퓨터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한다.
어떻게 하면 올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난 이런 고민과 거리가 멀었다. 내 자세가 좋았다 이야긴 아니다. 손목이나 목이 아프거나 하는 일이 지금까지 없었단 소리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이유 모를 두통이 잦아졌다.
자세를 바로잡으면 조금 나아졌다가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진통제나 스트레칭으로 조절은 되지만 자세를 올바르게 하지 않았을 경우 재발하는 두통.
전형적인 긴장성 두통 증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목 스트레칭을 해보긴 헀다.
허나 우리 거북목들의 나쁜 버릇은 몇 분간의 스트레칭이 몇 년간의 나쁜 습관을 고쳐줄거라 믿는 점이다.
몇 년간 쌓아온 뱃살이 몇 분의 운동으로 빠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당연히 일시적인 차도밖에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난 더 나은 자세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인체공학. 어고노믹 (Ergonomic)!
더 인체공학적인 환경을 찾아 모니터를 바꾸고 스탠딩 데스크도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인터넷 게시글을 통해 스플릿 키보드를 접하게 되었다.
원래 검도 이도류가 멋있지 않던가? 출처: https://easy-peasy.ai/ai-image-generator/images/elegant-double-swords-half-orc-warrior-dnd-5e-scene
작게, 더 작게! 키보드의 매력
코르네 키보드로 바로 넘어가기 전, 잠시 키보드의 종류를 몇 개 되짚고 넘어가보자 한다.
일반적인 키보드. 출처: http://bit.ly/47pY3X1
100% (풀배열):
가장 흔한 키보드다.
오른쪽에 숫자패드(넘패드)가 달린 키보드.
아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키보드 배열이 아닐까?
텐키리스 키보드. 출처: http://bit.ly/41wpZF4
80% (텐키리스):
풀배열에서 숫자패드만 제거한 형태다.
사실 나처럼 어릴 때 부터 노트북 사용이 잦은 사람이라면 숫자패드를 거의 쓰지 않으니 이런 형태에 익숙하지 않을까 싶다.
해피해킹 키보드. 출처: http://bit.ly/4gaGs7Y
60% ~:
여기서부터는 F1~F12 기능 키(펑션열)까지 사라지며 키보드가 더욱 작아진다.
학부 시절 컴공과이던 후배 하나가 강력히 추천했던 해피해킹(HHKB) 키보드가 이쪽의 유명인사다.
그 친구는 Vim과 해피해킹의 조합이 개발 효율을 극대화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다만 난 Vim부터 적응하지 못해 해피해킹의 길로는 들어서지 않았다. 뭣보다 그렇게 해비한 개발자도 아니었으니까.
이 단계에선 키보드에 방향키가 사라지고 HJKL을 통해 방향키를 조절하게 된다 (레이어 키를 누르고 HJKL을 누르면 방향키가 입력되는 식. 개발계의 나름 근본 키매핑이라 한다.)
허나 당시에도 해피 해킹 키보드의 단촐함은 묘한 매력으로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었는데…
40% 키보드. https://keyboardsimulator.xyz/ 키보드 시뮬레이터에서 캡쳐해봤다.
40%:
미니멀리즘의 끝은 어디인가?
마침내 숫자열마저 날려버린 배치가 등장한다. 바로40% 키보드다.
이쯤 가면 거의 취향의 영역이기에 어떤 키를 남기고 어떤 키를 날릴지 역시도 다양해진다. 정형화된 제품은 없다는 소리인데.
이쯤 되면 키보드가 아니라 리모콘 수준이라며 평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각설하고, 내가 코르네 키보드가 이쪽에 속한다.
인체공학과 분리의 미학
이쯤에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인체공학(Ergonomic) 키보드이다.
아마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의 마이크로소프트나 로지텍 키보드를 다들 본 적 있을거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어고노믹 키보드. 출처 http://bit.ly/4g2KFdA
이런 키보드들의 가장 큰 특징은 가운데가 지붕처럼 솟아있는 텐팅(Tenting)이다.
악수할 때처럼, 손목은 완전히 눕히는 것보다 살짝 세워져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텐팅은 바로 이 자세를 유도해 손목의 부담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인체공학 키보드는 자연스럽게 키 배열을 좌우로 나누게 되는데….
스플릿 키보드는 이 분리라는 개념을 극대화한 키보드이다.
스플릿 키보드 예시: http://bit.ly/46pMUn9
스플릿 키보드의 가장 큰 장점. 바로 더 이상 키보드에 맞춰 어깨를 웅크릴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물론 하나이던 걸 둘로 쪼개 놓으니 거기서 오는 고충도 있기는 하다만…
아무튼 좁힐 수 밖에 없는 어깨를 넓게 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키보드보다 더 인체공학적임은 분명하다.
수많은 선택지 속, 내가 코르네를 선택한 이유
내가 선택한 모델은 알리익스프레스에서 구매한 코르네 v4.1 (3x6 배열) 모델이다.
내 코르네 키보드. 살면서 처음으로 키캡도 바꿔봤다.
흔히 스플릿 키보드 입문으로 종종 추천하는 배열인데. 내가 코르네를 선택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1. 입문자 친화적인 3x6 배열
40% 키보드는 숫자, 특수키, F키 등을 모두 레이어(Layer)를 통해 입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 키보드 배열에서 엄지로 누르는 파란 키들이 레이어 전환 키다.
노트북에서 흔히 쓰이는 Fn 키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Fn을 누르고 키를 누르면 원래 있는 키가 아닌 다른 키가 입력되지 않던가? 같은 식으로, 레이어 키를 이용해 다양한 키를 좁은 공간 안에 우겨넣는 것이 레이어의 요지이다.
물론 적응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코르네의 3x6 배열은 이런 극한의 미니멀리즘 속에서도 최소한의 편의성을 제공한다.
만약 3x5 배열이었다면 Tab, Ctrl, Shift 같은 필수적인 특수키를 배치할 공간이 정말 마땅치 않았을 거다.
홈 로우 모드 (Home Row Mod) 출처: https://sunaku.github.io/home-row-mods.html
물론 미니멀리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렇게 홈 로우 모드 (home row mod)라 해서 일반 키를 꾹 누르면 특수키가 되도록 세팅해서 쓰기도 한다.
3x5로 쓰는 사람들은 주로 이 기능을 사용하는 듯 한데. 내겐 조금 이른 영역이니 패스.
어쨌건 3x6 배열은 가장 바깥쪽에 한 줄의 여유가 있어, 특수키들을 배치하고 스플릿 키보드에 적응할 시간을 벌어줬다.
2. 가운데 추가 키: 타건 습관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다시 첨부하는 내 코르네 사진
내가 쓰는 코르네 4.1은 정확히는 3x6+4 배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양쪽 키보드 안쪽에 2개씩, 총 4개의 추가 키가 있는 모습이 보이는가? 이 키들 덕분에 세팅이 내겐 한결 편했다.
한국인 스플릿 키보드 유저들이 흔히 겪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ㅠ
와 b
키 문제다.
ㅠ
: 한글 두벌식에서 모음인ㅠ
는 오른손으로 치도록 설계되어 있는 반면.b
: 영문 쿼티에서b
는 왼손으로 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일까? 많은 사용자들이 습관적으로 ㅠ
를 왼손으로, b
를 오른손으로 친다.
하나로 된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문제가 없으나, 키보드가 분리되면 이 단점이 부각된다.
또 내 경우엔 y
키를 왼손으로 치는 버릇도 있어 이 부분 역시 불편했다.
내가 구입한 코르네엔 다행히 가운데 추가 키가 저렇게 있으니 y
와 ㅠ
같은 키들을 중복해서 왼손 오른손 모두 할당 할 수 있었다.
즉 타건 습관을 바꿀 필요 없이 스플릿 키보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는 소리다.
3. 순한 맛 컬럼 스태거
스플릿 키보드는 대부분 컬럼 스태거(Column Stagger) 방식을 채택한다.
기존 키보드가 각 행(Row)의 시작점을 다르게 배열한 것과 달리, 컬럼 스태거는 각 열(Column)의 높이를 손가락 길이에 맞춰 미세하게 조절한 방식이다.
검지, 중지, 약지, 소지 손가락의 자연스러운 위치를 고려한 인체공학적 설계다. 하지만 이 역시 기존 키보드와는 다른 배열이라 적응이 필요하다.
다행히 코르네는 이 컬럼 스태거의 휘어짐 정도가 다른 스플릿 키보드(예: 토템)에 비해 비교적 완만하다.
덕분에 큰 거부감 없이 익숙해지기도 쉬었다. 문제는 익숙해지고 나니 스태거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는 부분인데 원래 사람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엄지의 활용성: 썸 클러스터(Thumb Cluster)
스플릿 키보드에 적응하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엄지손가락의 활용도가 극대화되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손에서 가장 힘세고 자유로운 손가락은 엄지다. 다만 기존 키보드에서 엄지의 역할은 고작 스페이스바를 누르는 것이 전부였다. 스플릿 키보드는 썸 클러스터(Thumb Cluster)라 불리는 엄지 전용 키들을 통해 엄지의 잠재력을 극대화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내 엄지 영역을 재구성했다.
- 왼손 엄지: Alt, 레이어 전환 키, 스페이스
- 오른손 엄지: 백스페이스, 엔터, 레이어 전환 키
특히 백스페이스를 엄지로 누르게 된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돌이키면 백스페이스는 타이핑 중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키 중 하나이다. 그런 면에선 새끼손가락이 아니라 가장 강한 손가락인 엄지로 이걸 누르는게 더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손목의 피로도도 꽤 줄었다. 모든 키들이 가까이 있어서 손을 뻗거나 크게 움직일 일도 줄었기 때문.
4주간의 불편함. 이후의 해방감
솔직히 처음에는 타자 속도가 잘 안나왔다. 영 어색해서 괜히 샀나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꾸준히 사용하며 내게 맞게 배열을 수정하고 적응했더니 지금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편해졌다. 내가 원하는 기능들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배열하고 배정하는 자유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어깨너비에 맞춰 키보드를 넓게 벌려놓고 작업하니 이전보다 훨씬 편안했다. 어깨가 펴지니 어째 굽었던 등과 목도 따라 펴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또 내게 맞는 커스텀 키보드와 키매핑을 만들어나가는 재미도 있었다.
혹시 오랜 컴퓨터 작업으로 인한 자세 불균형과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 어쩌면 스플릿 키보드가 어쩌면 당신의 해법이 될지도 모른다.
처음의 적응기간만 잘 극복한다면 말이다 😅
키보드 ‘래빗홀’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다보니 다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키보드 세계는 토끼굴(rabbit hole)과 같다고. 한 번 깊이 빠져들게 된다면 끝없이 빠져든다는 소리다.
코르네를 구입하고 40% 스플릿 키보드에 적응함으로서 어느정도 성취를 이뤘다 생각했는데,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키보드 세계에는 깊은 심연이 있었다.
일단 앞서 말한 3x5 배열과 같은 극한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고수들이 있었다.
앞서 말한 ‘홈로우 모디(Home Row Mods)를 통해 asdf
, jkl;
와 같은 기본 자리에 Ctrl, Shift, Alt 등의 모든 특수키를 할당하며 손가락의 이동을 최소화시키는… 나로선 범접 할 수 없는 차원의 효율성을 견식하기도 했다.
나도 이 개념을 조금 적용해서 Ctrl 키는 홈로우 모디를 통해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Shift 키 사용도 잦은 편이라 홈로우 키가 발동되는 짧은 그 딜레이가 맘에 들지 않았고 결국 shift는 왼쪽 키보드 6번째 열에 배정하게 되었다.
분명 좋은 방식이지만, 홈 로우 모드는 내겐 아직 이른 기술인 듯 하다.
키보드 토끼굴의 더 깊은 심연엔 이런 물건도 있었다.
스플릿 키보드(?)의 끝판왕 스발보드 (svalboard) 출처: 스발보드 웹사이트: https://svalboard.com/products/lightly
스발보드(SVALBOARD)라는 물건이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일단 이 지경까지 온 사람들은 마우스 대신 트랙볼을 사용하는게 기본이 된다. 보면 알겠지만 저 물건은키를 누르는게 아니라 손가락을 상하좌우로 움직임으로서 그 움직임으로 타건하는 방식이다.
솔직히 진짜 한번 써보고 싶기는 한데 차마 구입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래도 저걸 쓰면 건담 조종석에 앉은 파일럿이 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다.
트랙볼이나 트랙패드도 고려해봤지만, 난 버티컬 마우스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손이 키보드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귀찮을 때를 위해 마우스키를 할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물리적인 마우스가 있는 편이 나는 아직 편하다.
이 모든 여정의 종착역에는… 직접 회로를 설계하고, 인두기를 손에 쥔 채 납땜을 하며 나만의 커스텀 키보드를 만들고, 3D 프린터로 세상에 하나뿐인 케이스를 출력하는 경지에 이른 고수들도 있었다.
솔직히 창작 과정을 보면 진짜 재밌어보이긴 한데 학부 졸업 이후로 인두기를 손에 든 적도 없고 3D 프린터를 집에 들여놓을 계획도 아직 없어서 엄두가 나진 않는다.
아무튼 이렇듯 키보드의 세계는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아주 깊고도 즐거운 취미의 영역인 듯 하다.
사실 이번 포스트에서 커버한 내용도 아주 일부고, 스위치며 키캡이며 들어가면 또 다른 세계가 있더라. 키압이 어쩌니 스위치는 어떤게 좋고 키캡은 어떤건 낮고 어떤건 높아서 뭐가 더 좋고…
일단 난 기본으로 온 키캡에 몇가지 커스텀 키캡을 씌우는 정도로 만족했다.
아무튼 나는 지금의 코르네 키보드에 아주 만족하며, 당분간은 이 편안함에 머무를 생각이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 언젠가 나도 모르게 토템 키보드나 3x5 배열을 검색하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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